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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종결되지 않은 비극 - 콩고민주공화국 생생칼럼 5

종결되지 않은 비극 - 르완다 내전에서 콩고 1차 전쟁까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ODA 인턴 신희철
 
처음 ODA 인턴을 신청하게 되었을 때 콩고 민주 공화국이라는 나라에 아는 정보가 별로 없었습니다.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필수 수업 논문 주제로 양민학살(Genocide)이라는 주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콩고 내전 당시 아프리카인들이 겪은 피해와 희생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만 알게 되었을 뿐, 상대적으로 더 유명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나 같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미얀마 사태 등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콩고민주공화국에 가기로 결정이 되고 KOICA 교육원에서 KVO 서울 사무실에서 콩고 민주 공화국에 대해서 교육을 받게 되면서 점점 콩고 내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콩고 내전이라고 불리지만 콩고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콩고는 내부적인 분쟁에서부터 아프리카 이외의 국가들까지 개입한 국제전까지 여러 형태의 전쟁과 분쟁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에는 멀리 벨기에 식민지배 시절의 역사와 최근 핸드폰의 필수 자원인 콜탄 등의 자원 문제가 얽혀있습니다.
 


KVO의 활동지역인 동부 주의 주도 키상가니 시에도 콩고 전쟁 당시 생긴 상흔들이 도시 도처에 남아 있습니다.
파괴되어 있는 도로와 총탄이 남아있는 건물들이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채 있으며, 마을 곳곳에는 참호들이 파져 있습니다. 이 참호들은 비만 오면 구덩이가 되어 모기들의 서식지가 되어 키상가니 시의 말라리아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가시적 피해들 보다 전쟁의 상흔은 키상가니 시민들 마음속에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KVO의 유일한 행정 직원인 Benjamin씨는 복잡한 콩고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경험을 가진 분입니다.
키상가니 시 출신으로 신부 수업 과정을 받던 벤자민씨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유럽으로 신학과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발생한 콩고 내전으로 인해 고국으로 강제로 송환되었습니다.
게다가 외국에서 생활하기 위해 받았던 비자를 비롯한 모든 문서들마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콩고 민주 공화국의 지식인들이 콩고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국적을 취득했으나, 벤자민씨는 고국의 어려운 현실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 우간다와 르완다 국경 지대에서 전쟁을 경험하면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유럽에서 공부한 내용들을 증명할 문서가 없어졌고 다시 나갈 기회와 돈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010년부터 KVO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네달란드어, 링갈라어, 스와힐리어 5개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콩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언제나 친절히 설명해주는 벤자민씨 덕분에 아프리카 생활 적응이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직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다른 문화와 다른 관습 때문에 고충이 많았을 텐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벤자민씨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업무 시간 중에 틈틈이 시간이 나거나 관공서에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제가 역사를 전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콩고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애기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중에서도 벤자민씨가 직접 경험한 콩고 내전 이야기는 책과 인터넷 기사로만 접했던 저에게 생생하게 들려왔습니다.
 
 
벤자민씨는 우선 콩고 내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완다 내전을 이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르완다 내전은 벨기에 식민지배 시절 다수의 후투족을 통치하기 위해 소수의 투치족에게 많은 권력과 힘을 실어 주었고, 이로 인해 두 부족 사이의 커져간 갈등과 증오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르완다 내전과 관련하여 <호텔 르완다>라는 유명한 영화가 나오면서 아프리카내의 식민 지배 시절 서구 국가들의 과오가 현재까지 남아 있음을 전 세계에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르완다 내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내전 이후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르완다 내전 이후에 콩고 동부에 들어온 후투족은 ‘르완다 해방 전선’을 결성하여 무장 세력을 만들고 콩고 동부에 살고 있는 투치족들을 살해하기도 하면서 투치족의 르완다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여기서 콩고 민주 공화국과 르완다와의 갈등이 빗어지게 된 이유는 이 후투족 무장 세력을 콩고의 독재자였던 모부투가 지원을 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모부투는 자신의 독재 정치에 반항해 왔던 투치족과 이를 지원하는 르완다 정부가 거슬렸던 것입니다.
 


이런 모부투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르완다의 투치 정부는 콩고 동부 투치족 반군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1996년 제 1차 콩고 내전의 시작입니다.
내전이 시작됨에 다라 투치족은 모부투에 대항한 전력이 있는 로랑 카빌라를 콩고의 새로운 지도자로 대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카빌라는 과거 반군 시절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도움을 받았기도 했지만, 혁명보다 돈과 여자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체 게바라에게 비추어 그의 도움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94년의 카빌라는 르완다 군대의 지원으로 장기 독재로 부패해진 자이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콩고 민주 공화국을 세우게 됩니다. 냉전 시절 아프리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국의 많은 지원을 받았던 모부투 정권이었지만, 탈냉전 시대에 돌입하면서 미국의 군사, 외교, 경제적 지원 등이 대폭 줄었기 때문입니다.
정권을 잡은 카빌라는 자신을 지원했던 투치족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내전과 험한 산악지형에서 단련된 르완다군을 이겨내기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명목상으로는 배신자에 대한 주살을 외친 르완다지만, 실제로는 풍부한 광물 자원과 넓은 영토가 필요한 르완다는 콩고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같은 투치족 출신의 무세베니 대통령이 권력을 잡고 있느 우간다를 끌어들였습니다. 르완다와 마찬가지로 콩고 동부의 자원이 탐난 우간다가 참전하고 르완다의 남쪽에 위치한 부룬디 까지 참전하면서 1998년 제 2차 콩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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