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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한 아이의 분노 - 콩고민주공화국 생생 칼럼 4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보내온 최명길 인턴의 현지 생생 칼럼
<한 아이의 분노>
 
하루는 키상가니 시내에 업무차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동 중에 KVO차량의 타이어에 이상이 생겨 수리를 하러 카센터에 들렸습니다.
엔지니어가 수리를 하는 동안에 가만히 많은 인파들로 어수선한 시내를 바라보니, 바쁘게만 다녔던 평상시와는 다르게 이런 저런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테이블과 파라솔 하나만 길 가장자리에 두고 휴대전화기를 충전해주는 노점상, 싸구려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즉석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 투명한 일회용 비닐 봉지에 시원한 생수를 담아 두세개 씩 들고 다니면서 가격을 외치는 사람, 깨끗한 자전거 뒷좌석에 화려한 형광색 쿠션을 달아 손님을 태우는 자전거 택시, 작은 오토바이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더블 침대 매트리스를 접어 묶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배달하는 사람, 숯불 위에서 고기를 맛있게 구우며 한 조각씩 판매하는 사람, 큰 스피커에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는 사람, 작은 가게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를 세상모르고 보는  학생들...과 같은 사람 사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는 배고픔에 지쳐 구걸을 하러 다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아버지로 보이는 할아버지의 한쪽 손을 자신의 어깨에 올리고 앞장서서 걸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배고프다는 제스처를 하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앞으로 보지 못 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부녀를 외면하였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외면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잠깐의 호의로 인해 그들과 저에게 다가올 악영향을 외면하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판단하였고 그렇게 행동하는 법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런 후 부녀는 아무말 없이 뒤돌아서서 다른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며 갔습니다.
 

한참 후에 한 아이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와 같은 타지인이 흔치 않은 이 곳에서 자신의 눈길을 끌어 단순한 호기심에 다가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저에게 다가와서 제스처와 신음소리로 배고픔을 호소하였습니다.
진료소 주변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매우 노골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외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 아이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주위 현지인들의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이의 시선마저 외면해야 했고 한참 후 수리가 끝나자 다른 업무를 위해 이동하려고 차량에 올라탔습니다.
그러자 제 곁에서 한참 동안 신음소리를 내던 아이는 갑자기 차량 옆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치고 화난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순간 화도 났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마음으로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그 아이의 분노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그런 배고픔이라는 고통을 받고 살고 있는지...
그 고통은 저를 포함한 어른들이 무책임하게 아이들에게 떠넘겨 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떠넘긴 사람 중에 하나인 제가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외면했다는 것이 일시적인 호의로 인한 악영향을 주는 것보다 훨씬 무책임한 것 같았습니다.
항상 어디서든지 교육을 받을 때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이에게는 무조건으로 물질적 호의를 베풀지 않는 것이 낫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것이 더 옳은 행동인가라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 아이는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다시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고, 극단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때의 그 순간이 그 아이의 마지막 도움을 요구하는 손길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모든 견해가 어떤 전문가들에게는 초심자의 순수한 마음으로밖에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드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지하는 의견이 옳은 것은 아니며 상황또한 항상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저와 같은 당사자들의 몫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직접 경험을 하는 것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값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는 미리 정해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갈라지고 터진 손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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