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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상욱 봉사자]KVO 인사동 관광통역자원봉사단

 인사동
내게 인사동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시기는 대한민~국의 함성이 전국을 흔들던 2002 FIFA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여름이었다. 예전엔 흔한 경우였지만, 1989년 여름 중3학년을 중퇴하고, 봉제공장 근무, 신문배달 등을 하며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까지 국가가 제공하는 제도권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주변의 도움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간 22세때까지 난 나 스스로의 앞가림을 하기에도 벅찬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7년간의 시간 동안 만났던 수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내가 이곳에서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연간 100억원이상의 상품을 전세계로 수출하는 한국 기업의 영업 총괄 책임자로 근무 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나는 믿는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사실을
대학 1학년이 되던 1996년 이후로 2002년까지 난 매학기, 매 방학 때마다 나름의 봉사활동을 하며, 나의 7년간의 소년 시절을 지켜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분들께 보은(報恩)을 하고자 했다. 2002년 월드컵 자원봉사단 등록부 리더 봉사자로 2개월간 근무하며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손님들께, 언어를 통한 재능기부를 하며, 새삼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월드컵 자원봉사단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KVO 인사동 관광통역 자원봉사단원 분들과의 만남은 외국어를 통한 나의 재능 기부가 한번의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매주 1 4시간의 시간 동안 이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관광지 안내를 하며, 길안내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교감을 갖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월 100만원도 벌지 못하는 영어 학원 강사로, 무역협회 연수생으로, 작은 무역회사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던 시기였지만, 전문가다운 봉사단 관리의 노하우가 있는 KVO와 스텝분들은 당시 활동하던 60여 봉사단원 한 명, 한 명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봉사하는 사람의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잘 지켜 주었다. 우리 봉사단원들은 서로 의지하며, 서로 배우며,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 냈으며, 봉사가 끝난 후에는 스터디 소모임을 하며, 스스로 원해서 참여하는 봉사단의 최대의 시너지를 창출해 내었고, 당시 전국적 평가에서도 단연 가장 평판 좋은 봉사단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봉사단 단장을 맡았던 2006년 늦은 봄, 중국 청도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 후, 마음만 남겨두고 KVO 아프리카 어린이 결연 후원만 이어가고 있으나, 인사동에서 4년간 체득한 봉사정신은 지금 전세계 패션 브랜드 바이어들에게 한국 기업의 제품을 판매하는데 그 어떤 정규교육보다 훌륭한 서비스 교육이었다.
지금도 인사동 관련 뉴스가 보도 될 때면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우리의 옛 것이 상업화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고 단단히 남아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줄 상징이 되어야 하고 인사동이 바로 그것들 중에 하나이며, KVO 인사동 관광통역자원봉사단이 지금까지 그것을 잘 지켜왔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하기 그지없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지금, 전통이라는 단어에 담긴 깊은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정상욱 봉사자
KVO 인사동 관광통역자원봉사단 활동시기: 2002 ~ 2006 ( 4)
*현재 직업: 중국 산동성 청도 소재 청도 영패션 쥬얼리무역부 차장
해외 영업부 중국 주재원 근무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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