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이경헌 단원
사랑에는 정말로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 비쇼프투에 열린 토요일 오픈마켓(장날)의 모습. 신선하고 다양한 야채를 팔고 있는 상인들
▶ 비쇼프투에 열린 토요일 오픈마켓(장날)의 모습.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지 4일째가 되던 오후,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을 겪게 된다. 비쇼프투시에는 일주일에 세 번(화, 목, 토) 오픈마켓이 열리는데 4일째가 되던 날은 오픈마켓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고 요란스러운 토요일의 장날이었다. 대부분의 사건이 아무 것도 몰라서 긴장하고 있는 비교적 처음의 기간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질 때쯤 그러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방심할 때 발생한다. 4일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익숙해지기에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도에 비해 비교적 순박하고 호의적인 마을 사람들에게 이미 경계심을 풀어버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나와 함께 파견된 언니가 휴대전화에 찍어둔 영수증을 확인하고자 걸어가며 사진첩을 보고 있었는데 어떤 소년이 달려와 휴대전화를 낚아채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언니는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따라 뛰어갔고 나도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언니가 내지른 고함에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함께 뒤쫓아주었고 마침 맞은편에서 작은 짐차를 몰고 오던 아저씨가 소년으로부터 휴대전화를 되찾아 주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아프리카에서 물건을 뺏기거나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 도둑을 쫓아가는 일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란다. 그 이전에 길거리에서 아무런 경계심 없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자체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어느 국가에서도 위험한 일임을 스스로가 인지하였어야 한다. 사실 아직도 우리의 휴대전화를 훔치려 했던 아이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일원이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경계와 거리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서로에 대한 예의, 믿음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이 사건을 통해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성장
가난의 의미를 깨닫다
▶아름다운 호수가 인상적인 비쇼트푸의 모습
내가 살고 있는 비쇼프투는 지방의 한 도시인데 호수가 7개나 위치하고 있고 호수 주변으로 리조트가 들어서있는 에티오피아 휴양지 중의 한 곳이다. 북쪽의 랄리벨라나 악숨 같은 곳이 역사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라하면 비쇼프투는 수도에서 차로 1~2시간이 걸리는 휴양지다. 그러나 여기도 리조트를 제외하면 수도와 비교하여 시골과 다름 아니기에 한 번씩 수도(아디스아바바)를 가는 일은 지방에 있는 봉사단원들에게 콧바람 쐬러 가는 신남이다. 수도에 있는 봉사단원들과 만나 이런저런 경험을 공유하고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진귀한 음식–치즈케이크, 아이스크림, 치킨, 한국 음식 등등–을 먹다보면 여기가 에티오피아인지 한국인지 어느새 잊게 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또 다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는데 밤 10시가 되었을까, 버스정류장을 지나치는데 한 아이가 티셔츠를 길게 늘어뜨려 무릎을 덮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는 순간 ‘아, 여기가 에티오피아였지’ 하고 얕은 탄식을 내뱉게 된다. 에티오피아에 온 사람들이 가끔 의아하게 여기는 일 중의 하나가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너무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인데 이는 이 나라 종교인 정교회와 관련이 있다.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행위가 돈을 주는 사람이 천국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받는 사람은 늘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날도 밤이 늦도록 엄마가 어린 아이를 업고 돈을 달라고 하거나 어른 아이를 앞세워 구걸하는 모습을 엄청나게 보았다. 그러나 흐느끼지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어린 아이의 모습은 정말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다. 이것이 진짜 가난이 아닐까? 진짜 가난은 가난을 표현하는 일조차 두렵게 만든다. 크게 소리 내지도 흐느끼지도 못하고 그저 고통을 꾸역꾸역 삼키는 것이다.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어깨를 내어줄 누군가가 있는 사람에게 눈물은 가치 있다. 눈물을 닦아줄 누군가를 기대할 수조차 없는 이들에게 눈물은 어렵기만 하다.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마저 빼앗는 행위다, 그것은.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나 돈 너무 없어, 맛있는 것 사줘’하고 소리 내어 자신의 가난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가난을 표현할 수조차 없어 숨죽여 짐짓 아닌 체 하는 이들도 있다. 가난을 표현하는 순간 정말로 자신의 가난이 드러날까 고통스러운 이들이야말로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다. 남을 속이고 언젠가는 자신마저 속이고, 가난은 인간으로서 가져야만 하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그들로부터 앗아간다.
내가 에티오피아에 파견되기 전만 해도 나는 가난을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 물질적으로 궁핍한 상태라고 정의 내렸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보고 듣고 느낀 바로는 가난이 그렇게 단순히 정의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빈곤에서 권력으로》에서 던컨 그린 역시 실제 빈곤은 최소한의 삶의 조건조차 갖출 수 없는 ‘자유의 부재’라고 주장했다. 현재 물리적 장벽뿐만 아니라 마음의 장벽까지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미국과 멕시코의 사례를 보더라도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두 나라가 같은 대륙에서 비슷한 수준의 자원을 가지고도 오늘날 이렇게 소위 부국과 빈국으로 갈라진 이유 역시 민주적인 제도, 이를 테면 평등한 기회, 공정한 경쟁, 정당한 보상 등의 가치를 지키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차이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지난 2015년 에티오피아에 방문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아프리카의 빈곤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폐해도 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재와 권력층의 부의 독점이 더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자금의 투입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발전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이다.
▶ KVO 비쇼프투 센터에서 대안 생리대 제작 교육이 진행되는 모습
▶ KVO 비쇼프투 센터에서 학부모대상 인식개선 교육이 진행되는 모습
▶ 5개 공립 초등학교에 교육도서 및 컴퓨터 기증식이 이루어지는 모습
▶ 비쇼프투시 시장이 참석한 물탱크 완공식 현장의 모습
▶ KVO 비쇼프투 센터에서 있었던 한국 문화의 날. 아이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 KVO 비쇼프투 센터에서 있었던 한국 문화의 날. 나를 예쁘게 그려준 아이들과 함께.
▶ 학습에 유용한 교보재를 지원받은 아이들의 모습
▶ 공책과 필기구를 받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 역량강화를 통해 아이들이 꿈의 날개를 타고 비상하기를
가난이 이렇듯 단순한 궁핍의 상태가 아니라 민주적인 제도의 부재, 자유의 부재 등이 복잡하게 맞물려 발생하는 참혹한 과정이자 결과라고 생각해볼 때 다양한 NGO에서 진행하는 지원의 모습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껏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어미 새와 어린 새의 예를 들면서 어미 새가 어린 새에게 먹이를 직접 물려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먹잇감을 구할 수 있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는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에티오피아에서의 1년을 통해 그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 하늘을 비상하는 날갯짓을 꿈꿀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진짜 도움이란 도움을 받는 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고 자기 안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깨달음이 나에게는 활동 기간의 종착점인 동시에 출발점이다. 에티오피아의 어린 학생들이 이런 꿈의 날개를 달 수 있도록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길, 앞으로 단체의 활동들이 이러한 변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에티오피아] 이경헌 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