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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콩고강과 쵸포댐

 
콩고강과 쵸포댐
 
 
제 4호 울산 문수필담 수록
KVO 박을남 대표
 
 
 

  DR.Congo에 가야한다!
    올해 5월에 KVO 말라리아센터(병원)를 DR.Congo(콩고민주공화국) 오리엔탈주 키상가니 市에서 개소했다. 오픈식 때 가야했으나 사정상 갈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 KVO 본부장을 비롯한 현지 직원들과 DR.Congo 정부 측 내빈들이 참여한 가운데 조촐하지만 성공적인 개소식을 가졌었다. 그래서 늘 가봐야지 하는 마음을 안고 있었다.

    그러다 약 2개월이 지난 올해 7월 중 의과대학생 봉사단을 이끌고 그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의대생으로 이루어진 봉사단 14명과 일반 봉사자 2명, 직원 3명 총 20여명이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티오피아 직항 노선이 올해부터 생겼다고 하여 케냐가 아닌 에티오피아를 거쳐 DR.Congo의 수도 킨샤사 공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케냐, 에티오피아, 가나 등의 사업장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이곳 방문은 처음이라 몹시 긴장되고 설렜다. 적도 가까운 콩고강을 낀 밀림 지역이니, 내가 25년 전 해 수로 4년을 지냈던 아마존 밀림과 비슷할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푸른 밀림 속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공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킨샤사 공항에 발을 내 디뎠다. 짐작은 했지만 상상보다 훨씬 못 미치는 환경이었다. 지금까지 가 본 나라 중 최악의 상황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수도가 아니라 제 3의 도시 키상가니였다. 한국에서 15시간 정도를 날아 왔는데 또 5시간 정도를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가야한다고 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여 미리 예약된 킨샤사 시내 숙소로 이동을 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도중 내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광경들을 목격했다. 길거리는 폭탄을 맞은 것처럼 부서진 육교가 그대로 방치되어있었고 시장 거래는 온통 쓰레기 더미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활보하는데,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분명히 차도인데도 신호등도 없이 차반 사람반으로 가득 차있어 차가 걸음마를 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기사가 비켜달라고 경적을 울리자 새까만 피부의 청년들이 화난 얼굴로 팔을 뻗어 욕지거리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얼른 창문을 꼭 닫았다. 모두가 공포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차 뒷바퀴에 매달려 가는 사람,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트럭의 짐더미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서 가는 사람, 바게트 빵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는 사람, 새까만 피부의 인파가 쓰레기 더미로 형성된 시장 거리를 활보하는 등 이 모든 것이 저녁 불빛과 함께 세계에서 단하나 뿐인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밀려오는 공포심에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 또 한편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라는 걱정이 앞섰다. 나 혼자 뛴다하여 곧장 해결될 일도 아니라 가슴이 더욱 답답해왔다. 정말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위생이 전혀 안된 이곳에 전염병이 창궐함은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이 나라 평균 수명은 54.36세 이다. 정말 앞이 캄캄해 보이는 시간이었다.
     시내 중심지에 들어서니 좀 사람 사는 곳 같은 집들이 보였다. 수도라도 빌딩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30분이면 도착할 곳이 1시간 이상이 지체되었으니 모두 배가 고팠다. 미리 하루 전에 주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옛날 사전에도 올랐었다는 ‘코리언 타임’이 생각났다. 6.25 직후에 태어난 우리 어릴 적에 많이 들었던 말이다. 우리 숙소를 방문한 KOICA 소장이 해준 위로의 말을 빌자면, 대사관 행사 때도 음식 주문을 했는데 2시간 반 정도가 늦어져 낭패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말 대책이 없어 보이는 나라인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7시 키상가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했다. 국내선 공항은 꼭 우리나라의 시골 장날 같았다. 시끄러워서 옆 사람의 말이 안 들릴 지경이었다. 앉을 의자 하나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짐을 많이 실으려는 사람들과 짐이 초과했다고 초과금을 지불하라는 공항직원들 간의 싸우는 큰소리에 우리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KVO가 처음 이 곳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언론을 통해 성폭행이 난무하다는 것을 안 우리로서는 남자 직원만을 보내야 하는데 당시엔 마땅히 갈 사람이 없었다. 연세 있으신 두 수녀님이 이 상황을 알고 자원 하셨다. 그 때 연세 많으신 수녀님 두 분이 걱정하는 나를 보고 ‘우리는 수녀라서 괜찮다. 우리는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다.’ 라고 하시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던 일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처음 봉사자 한 분이 파견되어 이 곳 공항에서 울었다는 이야기가 새삼 가슴을 찡하게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온 남자가 울었을 그 마음이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국내에서 다섯 시간 정도를 날아 키상가니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다가 오리엔탈주 재무장관과 마주치게 되어 인사를 주고받았다. KVO말라리아 센터 개소식에 보건국 장관과 함께 참석한 적이 있다고 우리 직원이 소개해줬다. 그는 자기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줘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의 표정과 태도에서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재무 장관의 도움으로 X선 투과기도 없이, 손으로 4번씩이나 짐을 뒤지는 일없이 쉽게 공항에서 나올 수 있었다. 비행기 탈 때에 비하면 무척 큰 행운이었다.
 
 
 

 
     공항 주변에는 UN군의 막사가 있고 UN군이 지키고 있었다.
   소텍스키(SOTEXKI)!
     우리 KVO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공항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소텍스키는 DR.Congo가 벨기에 식민지 시절(1960년대 독립) 벨기에 사람들이 설립하여 운영하던 방직공장이다. 당시 벨기에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철조망을 두르고 안전지역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당시에 지은 것이라 집이 낡았지만 외국인이 많이 사는 이곳은 정부군과 사설 경비원이 지켜 주고 있다.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는 이 나라에서 그나마 안전지대이기에 이곳을 소개 받아 사무실과 파견 직원들의 숙소로 쓰고 있는 것이다. 오래되어 낡았지만 유럽인들이 지은 집이라 유럽풍이 물씬 느껴지고, 높은 강변에 위치한 이 곳 산책로는 숲길을 걷는 봉사자들에게 유일하게 휴식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자유공간이다. 그러나 공장의 큰 대문을 나서면 완전 별천지가 되어버린다. 우리 KVO의 말라리아 센터는 바로 맞은편 마을에서 큰 집을 빌려서 2년 동안 진료를 해왔다. 한 달 평균 2천 여 명의 환자들이 다녀간다. 지금은 새롭게 진료소(말라리아 센터)를 지어 지난해 5월에 문을 열었다. 그 진료소는 사무실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좀 더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까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직원들은 매일 자전거 또는 오토바이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고 있다.
      진료소까지 걸어가기도 하는데 새로운 진료소가 생긴 이후로 그 주변이 매우 많이 변했다고 한다. 진료소 문 앞 구경 한 번 하기가 쉽지 않은 주민들이 길 주변에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짓고 있는 집들이 꽤 많았다. 숲속에 살던 사람들이 도로 주변으로 나와서 간단한 음료수와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도 생겨나고 있었다. 진료소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한 달에 약 2천 명 정도니 마을이 하나 새로 형성될 것이라 지방 정부에서도 내다보고 있다고 했다.
      KVO 말라리아 센터(진료소)는 주변의 소문난 명물이 되었다. 콘크리트 벽돌 건물에 높아서 시원한 천정과 지붕, 태양광 전기, 우물에서 자동식으로 뽑아 올리는 수도, 수세식 변기 등. 원주민들에겐 꿈에 그리던 곳이다. 그들의 입을 빌리자면 키상가니 의대 병원보다 좋다고 했다. 규모면에서는 어림도 없지만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최고라는 말을 했다. 우리의 눈에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는데....
 
 

 


      짐을 풀고 말라리아 센터를 방문했다. 우리나라 의대생들과 키상가니 의대생들이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조를 맞추고 본격적인 봉사활동에 들어갔다. 봉사활동은 두 팀으로 나누어 센터로부터 3km 정도 떨어진  마을에서 실시했다. 목적은 이미 배포된 모기장을 점검하고 사용에 대한 설문을 한 다음, 새로운 가정에 모기장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찌는 듯한 땡볕에 2km를 걸어서 마을에 도착하여 선풍기도 없는 집안에 들어가 모기장 점검과 설치, 설문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나도 동행을 했다. 헉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는데 의외로 우리 대학생들이 싫다는 기색은커녕 아무 불만 없이 잘 해나갔다. 정말 기특한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인식이 싹 가시는 순간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봉사활동, 말라리아에 대한 양국의 연구 발표, 그리고 토론 등 빡빡한 스케줄을 현지 친구들과 협동하여 너무나 소화를 잘 해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다른 일정 땜에 하루 늦게 혼자 도착한 지도 교수님은 워낙 오지의 베테랑이시라 그 어려운 먼 길을 혼자서도 무사히 잘 찾아오신 것 같아 기뻤다.
 
 

 
     일정 속에 키상가니 의대와 대학병원도 방문했다. 시설을 둘러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만약 내가 아파서 이곳에 입원하라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장님은 안 계셔서 부원장님을 방문했는데, 부원장님 실에 인터넷이 안 된다고 하소연을 했다. 정말 비참한 현실이었다. 세계에서 다이아몬드가 제일 많이 묻힌 이곳, 그래서 행복하지가 못하다.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곳, 최근에도 DR.Congo 동부에 위치한 고마 市가 반군에 점령당하였고 겨우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중재해 내전은 중단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처럼 불안한 곳이다.
      키상가니 市는 아주 평화롭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많은 곳이다. 적군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온 마을 여성들이 성폭행 당한 일 등은 세계 언론을 통해서도 보고가 된 것들이다. 우리도 직원이나 봉사자들에게 늘 당부한다. 안전지대 외는 가지 말고. 밤에 다니지 말라고. 지켜야할 주의 사항들이 매우 많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하루전날 마지막으로 콩고강과 쵸포댐을 가보는 지역 탐방 스케줄이 있었다. TV를 통해서 보았던 콩고강은 그대로인데 아비사 원장이 소개해 준 강변 원주민마을 추장은 현대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직업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시장에서 환전상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모 방송사에서 와서 방송을 찍을 때는 원주민 복장으로 갈아입었다는 말을 하면서 그때처럼 돈을 많이 요구했다. 우리는 촬영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그냥 강 구경만 하러 와서 그만큼 줄 수가 없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위협을 하는 듯 했다. 몹시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 쵸포댐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그냥 돌아왔다. 전쟁 당시 쵸포댐에는 민간인을 잡아다 600여 명의 목을 메달아 놓았던 곳이라고 했다. 전쟁의 아픈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그 곳이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상처투성이라는 것이 어딜 가나 느껴졌다. 그리고 초기부터 우리가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대주교님에 대한 존경심은 아주 대단했다. 도시가 점령됐을 때 정부 관리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대주교님은 끝까지 주민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성당이 적의 포탄을 맞았을 때도 주민들이 함께 불을 끄고 단결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주교님은 그 누구보다 존경 받는 인물이라고 자랑들을 했다. 대주교님의 말씀이 곧 주민들의 법이라고 할 정도이다.
 
       말라리아 센터 사업은 말라리아로부터 임산부와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존과 흡사할 곳이라 생각하고 일을 추진했었다. 그런데 이번 콩고 방문을 통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밀림지역이며, 강과 숲이 우거지고 열대우림이기 때문에 말라리아가 창궐한다는 점은 같았다. 그러나 말라리아의 종류가 지역마다 다르고 예방약과 치료약도 지역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양 대학 교수님들의 발표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전쟁이 없었던 아마존 밀림은 가난하고 말라리아에 노출되어 있지만 매우 평화롭다는 점이고, 콩고강을 안고 있는 DR.Congo는 같은 밀림이면서 말라리아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상처로 마음과 몸이 다 상처를 입고 있어 치유나 회복의 기간과 방법이 훨씬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구상에 전쟁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분단국인 우리나라에도 절대로 전쟁은 없어야할 것이다.  
 
      귀국 두 달 후 사진이 왔다. 현지 사무실에서부터 말라리아 센터까지 2km의 길이 넓혀지고 평탄하게 확 뚫린 한 장의 사진이었다. 오리엔탈 주정부가 차도 다니기 힘들었던 울퉁불퉁한 길을 고속도로처럼 만들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비록 포장은 안 되어 있어도 물웅덩이만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센터 건물을 지을 때부터 자제 운반이 어려워 요청했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누군가 진정으로 일을 하면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작은 변화와 관심이 큰 관심과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한 지역에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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