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CADEAU)
DR콩고 최명길 ODA 인턴
‘선물(膳物)의 사전적 의미
_ 남에게 축하나 고마움의 뜻을 담아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또는 그 물건.’
- ‘선물’을 불어로 ‘Cadeau(카도)’라고 한다.
새 말라리아 센터 건축이 마무리 되고 난 후,
어느 날 건축인부 중 직위가 감독 격이었던 LOTIKA SONI 아저씨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나이가 적지 않은 그는 항상 부담스러울 만큼 자세를 낮춰 나를 존중해주고 밝은 표정으로 대해줬다.
그날도 역시 밝은 표정으로 나를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사무실 밖으로 불러냈고
사무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불어가 서툴러 정확한 의미는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마지막에 ‘Cadeau’라는 단어를 듣고 장황했던 서론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방문 목적은 나에게 건축 완료에 대한 선물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거짓 없는 천진난만의 태도였다.
가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태도였다.
직접 선물을 요구하는 뻔뻔함 또한 느낄 수 없었다.
반드시 무엇인가를 받아 내겠다는 현지인들 특유의 굳은 의지도 엿볼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나에게 바라는 ‘희망사항’이었다.
그 자리에서 단호히 거절해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갈 것이었다.
그는 그대로 불만 없이 일상생활로 돌아가 ‘Cadeau’라는 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었다.
솔직히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태도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랬다.
그래서 희망에 찬 얼굴에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일반 현지인들과는 다른) 태도에 대한 기쁨인지, 건축에 있어서 잘 마무리가 된 고마움인지
아니면, 안타까움에 사무쳐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애잔함을 그로 하여금 내 스스로가 위로하려는 것은 아닌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마음이 뒤섞여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지금 당장은 줄 ‘Cadeau’가 없으니 주말에 함께 시내에 함께 나가자고.
자고로 선물이란 남에게 축하나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어떤 물건 따위를 주는 것인데,
나는 고마움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가 추가된 것이다.
삼촌뻘 되는 어른이 조카 또래의 청년 앞에서 두 손 모아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아도 얼마나 쉽지 않는 일인지 알 것 같다.
그는 나의 말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 기쁨은 여분의 무엇인가를 얻어서 좋은 것이 클까,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어서 좋은 것이 클까.
전자이든 후자이든 굳이 따질 필요는 없지만, 나는 후자이기를 바란다.
내가 주는 기쁨을 배가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이 단순한 욕심이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약속한 주말이 되어 그와 함께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시내로 나갔다.
그 전에 며칠 동안 나는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너무 호화스럽지 않으면서 그의 생활수준에 맞는 물건이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어야 했다.
선물을 주더라도 받는 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아니거나
만족스럽지 못할 정도의 양일 때는 안 주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지인들 입장에서 거듭 생각을 했다.
내가 매일 가난에 허덕이는 입장이라면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길 원하는지.
처음에는 내 개인이 원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나만을 위한 선물, 내가 받았을 경우 만족스러울 것 같은 선물.
그런데 그는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12명이나 되는 가족원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보니 내가 줄 것은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을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 속에서 가장이 해야 되는 가장 큰 일은 가족원들을 굶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형편상 먹기 힘든 음식을 선물로 결정하였다.
과일과 채소 등은 비옥한 땅에서 자주 길러 먹는 것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흔히 먹을 수 없는 돼지고기를 선물하여 배불리 먹이기로 하였다.
12명분의 돼지고기 요리를 내가 직접 해줄 수는 없기에
요리를 할 수 있는 재료들을 아낌없이 선물하기로 하였다.
나는 겪어본 적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도 6·70년대에 가난한 집안에서는 고기 먹기가 힘들었고
고기를 어렵게 한 번 구해 먹더라도 국물을 많이 하여 배불리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부분에서 국물을 이용한 배불림은 삭제하고 고기로 배부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시내 시장에서 그와 함께 식재료들을 하나씩 구매하였다.
요리 방법을 모르는 나는 그가 원하는 식재료를 모두 구매해줬다.
모든 재료들을 구매하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작은 모자를 하나 선물하였다.
햇빛이 강렬한 현지에서 머리카락을 기르기 힘든 현지인들에게 상당히 유용한 것이 모자이고
(건축 일을 하면서) 그것을 누구보다 필요로 하는 것이 그였기에 선물을 한 것이다.
싸구려 모자였지만 명품을 받는 것처럼 좋아해주는 모습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받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
주는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항상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
항상 받아오며 살아간 것이 몸에 배어 주는 것에 너무 서툰 사람,
받는 것을 당연시하여 주는 이가 자신에게 배려를 베푼다고만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배려를 베풀지 모른다고 착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어느 지점이 중간인지를 모르는 것 같다.
항상 받는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내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나도 아직 받는 쪽으로 길어진 저울을 들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드시 균형을 맞춰 수평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받는 쪽이 무거워 기울어져 있어도 괜찮다.
앞으로 살아갈 삶에서 주는 쪽을 무겁게하여 반대로 기울어지도록 하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같은 기울기라면 지금부터라도 차곡차곡 채워나가 반대 기울기로 바꿔가길 바란다.
또 한 가지 염두에 둬야할 점은 물질적인 것만이 저울의 기울기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론 ‘주는’ 연습이 필요하다.(따지고 보면 연습과 실전이 공존한다.)
주는 것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쉽게만 생각했다가
오히려 실수를 범하고 뒤로 더 후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받는 입장에서 잘 생각해보면 답은 항상 보인다.
주는 기쁨은 자신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스스로의 마음이지
받는 이가 억지로 만들어서 제공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받는 이의 태도에 동요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결국 연습과 실전이 공존하는 ‘주는 것’은 스스로가 느끼고 실천해야 되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진정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해줄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준다는 것’보다 ‘나눈다’는 표현을 더욱 좋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눈다’는 것은 얼핏 보면 ‘준다는 것’과 같은 행동인데 더욱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와 내가 공유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진정 내가 그와 공유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자못 위선에 찬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 그들과 공유를 하고 있는지, 그들의 마음을 똑같이 느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나눈다’는 표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 그들의 마음을 100%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지 확신이 안 서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도 그들과 함께 말뿐이 아닌 진심으로 ‘나누는’ 때가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