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술의 발전과 경이로운 부(富)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엄청난 기회가 놓여 있다. 바로 지금이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끔찍한 빈곤을 끝낼 절호의 기회다. 2015년까지 ‘극빈(極貧)’ 상태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누가 산업화를 먼저 시작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을 수 있었느냐가 ‘지금 성공한 나라냐, 아니냐’를 갈라 놓았다.” “(교육 등으로) 지리적 악조건을 극복하는 힘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53) 미 컬럼비아대 교수의 주장은 명쾌했다. 빈곤퇴치의 절박함, 산업화의 중요성, 그리고 지리적 악조건을 극복하는 교육 등 인프라의 가치…. 세계 곳곳 경제현장을 누빈 ‘행동하는 경제학자’답게 그의 시야는 넓고 유연했다. 그는 로렌스 서머스·폴 크루그먼과 더불어 ‘경제학계의 3대 수퍼스타’로 불린다. 29세에 하버드대 최연소 정교수. 이어 하버드대 국제개발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그의 머리와 몸은 현장으로 옮아간다. 볼리비아의 극심한 초(超)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사태 타개를 위해 예리한 조언을 했고, 구(舊) 동구권 폴란드에 성공적인 시장 경제를 정착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2015년까지 농업·교육·남녀평등·보건·환경 부문을 개선, 절대빈곤 비율을 절반 이하로 줄이겠다는 유엔의 ‘천년 개발목표(MDGs·Millennium Development Goals)’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매년 타임(Time)지(誌) 선정 ‘세계 영향력 있는 100인’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유일한 석학(碩學)이다. 행동하는 ‘록스타(rock star) 경제학자’ 경제 탐험의 역사는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삭스는 노벨상 수상자 군나르 뮈르달의 저서 ‘아시아의 드라마’를 읽으며 인도를 여행했다. 이후 여정(旅程)은 볼리비아·폴란드·러시아·중국, 그리고 다시 인도…. 하지만 미지(未知)의 지역에 대한 호기심은 어느 새 경악과 두려움, 충격으로 뒤범벅된다. 아프리카에서, 그는 비참한 실상을 버티고 있는 아프리카인들과 호흡하고는 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 국제 원조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영역은 대륙을 넘나든다. 2005년 런던 지하철 테러 사건 당시엔 G8정상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에 머물다 파이낸셜 타임스(FT)에 곧바로 칼럼을 기고, ‘테러를 막기 위해선 군비 증강 보다 국제 원조 활동이 더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아프리카 정상회담이 열린 리비아로 건너가 아프리카 빈곤 문제 퇴치에 관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록스타 경제학자’란 별칭을 갖고 있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세계적 록그룹 ‘U2’의 보컬 보노(Bono)는 7년 째 빈곤 퇴치활동의 파트너다.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와는 미 MTV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 아프리카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수많은 젊은이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저서 ‘빈곤의 종말’을 읽고 전화를 걸어온 마돈나에겐 아프리카 말라위 원조에 대해 찬찬히 조언했다. “검은 대륙의 까만 눈동자들은 빨리 구해내야” 뉴욕타임스(NYT)는 제프리 삭스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로 뽑은 바 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가 내린 고금리 처방을 강력하게 비판한 인물로 우리에게 더 유명하다. 그는 1980년대부터 대외채무·인플레이션으로 고통 받는 개발도상국과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 사회주의 국가에 거시경제 정책에 대한 조언을 했다. 세계 경제에 관한 이런 풍부한 경험은 빈곤 퇴치 문제를 다룬 데 요긴하게 쓰인다. 그에 대해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학자들 중 선두에 있는 사람은 뉴욕대 윌리엄 이스털리(William Easterly) 교수. 그는 워싱턴 포스트에 ‘빈곤의 종말’을 재해석하는 비평을 실었다. “최근 부상하고 있는 국가들 중 상당수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 났다. 삭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무상 원조에 기대지 않았다.” 하지만 삭스는 “아프리카는 최악의 빈곤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다”며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함정으로부터 구하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정말이다. 그에겐 하루 2만 명 이상이 기아(饑餓)와 말라리아·에이즈·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끔찍한 아프리카의 현실 속에서 하루빨리 이들을 구해내는 게 더 급하다.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검은 대륙의 까만 눈동자들은 그의 목소리에서 오늘도 희망을 본다. 제프리 삭스 교수는 지난 7일 외교통상부·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유엔 천년 개발목표’의 달성방안을 주제로 서울에서 개최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전날 늦은 시각 서울에 도착, 다음날 아침부터 기조 연설·기자회견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지친 몸에 갈라지는 목소리였지만, 세계경제에 중요하고도 강한 메시지를 던졌다.
석학과 스타, 빈곤 타파를 위해 뭉치다 제프리 삭스(오른쪽) 교수가 아프리카 빈민국 구호를 위한 미 MTV 프로그램'안젤리나 졸리와 삭스 박사의 아프리카 다이어리(The Diary of Angelina Jolie and Dr. Jeffrey Sachs in Africa)'의 뉴욕 시사회장에서 함께 출연한 배우 안젤리나 졸리와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친선대사이자 미국 외교관계협회 회원인 졸리는 20여 개국을 누비며 민간 부문의 난민 구호 증진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두 사람은 2005년 9월 방영된‘다이어리’프로그램을 촬영하며 빈곤과 질병에 신음하고 있는 케냐 서부 지역 사우리를 이틀간 방문, 단돈 10달러로 한가족 전체를 말라리아로부터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등 실천적 구호 활동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깨우치기 위해 함께 일했다.
성공한 나라와 실패한 나라의 경계는 산업화
―역사적으로 볼 때 산업화에 실패한 나라들도 있고 성공한 나라들도 있습니다. 이들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있을텐데요?
“바로 산업화 여부입니다. 초기 경제 발전(early devel opment) 단계를 살펴보면 산업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게 바로 ‘해양과의 접근성’이었어요. 누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가느냐였지요. 무역으로 시장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느냐가 성공의 열쇠였죠.”
―성공한 나라의 비결이 딱 하나뿐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다음 단계에서는 기초 인프라(basic infrastructure)가 더 중요해졌어요. 도로·전력 등 사회 기초 인프라가 뒷받침돼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골고루 발전한 나라가 성공을 좌우했습니다. 이어서는 문맹률(illiteracy rate) 감소가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국민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작업에 성공해야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죠. 다음은 주권(sovereignty)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어요. 스스로 주권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해 진 거였죠.”
―그 외에도 강조할 것들이 있다면?
“온당한 환경(reasonable environment)이 중요합니다. 정기적으로 허리케인·화산폭발 등 자연 재해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지구상에는 매번 똑같은 재해로 인해 정기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프리카에서 가뭄은 매우 큰 피해를 낳고 있죠. ‘건강한 환경’ 역시 중요해요. 풍부한 경작지 확보도 중요하고…. 에너지 자원 역시 중요합니다. 이들 요인들을 종합해 봤을 때 누가 산업화를 먼저 시작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았느냐가 성공한 나라, 잘사는 나라를 갈라 놨어요.”
가난의 함정에 빠진 아프리카. 누군가 꺼내 줘야
―아프리카 지원에 큰 역할을 하고 계시죠? 왜 그렇게나 빈곤하고, 그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요?
“현재 아프리카 상황은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식민지배를 받은 탓에 제대로 된 교육 시스템이 정착할 기회가 없었어요. 지배자들이 ‘사람’에 투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이죠. 아프리카 국가들의 문맹률은 독립을 했음에도 끔찍하게 높았습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고요. 사회 인프라 역시 매우 취약해요. 아스팔트 깔린 도로도 찾아보기 힘들고, 전력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아프리카가) 빈곤에서 탈출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있나요?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말라리아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이쯤 되면 곤경(trouble)에 빠져 있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나는 그들이 계속 곤경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아프리카는 처음부터 ‘가난의 함정’에 빠졌을 뿐입니다. 함정에서 분명히 탈출할 수 있죠. 누군가 함정에서 나올 수 있는 문을 열어주면 됩니다. 밖에 있는 (잘사는) 사람들이 도와야 합니다.”
미국의 힘은 갈수록 약해질 것
―최근 독일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부(富)를 향한 전쟁’입니다. 이는 새롭게 도약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해 기존 선진국들의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어요. 세계 경제는 ‘제로섬 게임’인가요?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것은 ‘무서운 고양이를 키우는 격’이라는 주장은 옳은 것인가요?
“글쎄요…. 단지 제로섬 게임처럼 보일 뿐이죠. 선도국(leading power)은 신흥발전국(rising power)을 만나면 긴장하는 게 당연합니다. 신흥발전국 역시 그들의 발전을 가로 막으려는 선도국을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세계사엔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례들이 그득해요. 하지만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기회로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입장은 뭔가요?
“미국은 세계를 이끄는 경제 대국입니다. 하지만 힘은 점점 약해질 겁니다. 아시아에서 중국·인도가 치고 올라오고 있잖아요? 두 국가 모두 인구대국입니다. 나는 아시아 전역이 한꺼번에 부상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벌써부터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요. ‘중국을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 아래 군비 지출을 늘려가며 국수주의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중국도 덩달아 군비를 증강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세계를 ‘리스크(risk)’속으로 몰아가는 요인입니다. 대립(對立) 보다 상생(相生)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의 아프리카 지원은 유럽이 못한 일
―중국이 아프리카 원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를 자원 공급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원조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저는 중국의 아프리카 원조를 고무적인 일로 보고 있어요. 중국의 원조활동이 시작됐을 때 솔직이 기분이 좋았어요. 한국에도 많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비즈니스 부문에서 봤을 때 아프리카 대륙이 제공하는 자본의 질과 내용이 매우 훌륭해요. 유럽과 미국에선 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있지만,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어요.”
―중국의 아프리카 원조를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계시군요?
“그렇습니다. 중국의 원조로 아프리카는 새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고 있고, 소득 역시 증가를 보이고 있어요. 또 도로·발전소·항만 등 사회기반시설 건설에도 적극 나서고 있죠. 현재 유럽인들은 중국의 아프리카 원조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예요. ‘아프리카는 전통적으로 우리(유럽) 영역’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 영역에 들어와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 거죠. 정말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뭔지 아세요? 중국의 지배력 확장을 시시콜콜 따지려 드는 유럽은 바로 과거 100여 년 동안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했던 장본인이예요.(웃음) 나는 중국의 현재 역할에 만족합니다.”
―그래도 일방적인 지원과 시장 공략, 강대국의 질시(嫉視)는 언제인가 충돌을 만들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태생적 문제점도 생길 수밖에 없고.
“물론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환경 문제를 외면하는 자원 개발은 조심할 부분입니다. 아프리카 입장에선 신중해야 하고, 중국은 책임을 다해야 하겠죠.”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 될 것
―‘인도가 2050년쯤 세계 3위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인도 경제가 양적으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고도 했고…. 2050년 세계 경제 지형도는 어떠할까요?
“2050년? 단지 (저의) 가정입니다. 나는 원래 무언가를 예언하려고 하지 않아요.(웃음) 하지만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으로 여전히 예상해요. GNP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구 역시 견고한 성장을 보일 겁니다. 한국 역시 이 물결 속에서 부국(富國)으로 자리잡을 것이고…. 인도, 중국 모두 빈곤 상태를 털어내고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게 될 겁니다.”
―그럴까요? 벌써 노령화가 진행되는 곳입니다. 마냥 성장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옳은 의문입니다. 그때쯤 되면 이 지역의 인구성장이 멈출 겁니다. 하지만 환경면에서 보면 큰 이득이 될 겁니다. 바다에서 어류를 남획하거나, 경작하기 위해 숲을 파괴해 농지를 만드는 일 역시 줄어들 것이고. 웰빙 트렌드 역시 더 뚜렷해 질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이 도입될 겁니다. 이산화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 새 에너지원(源)이 개발되겠죠.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성장·민주주의·친환경 시스템이 뿌리 내릴 겁니다.”
―모든 전망에는 ‘낙관(樂觀)’과 ‘비관(悲觀)’의 양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낙관의 반대편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책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재앙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죠. 일단 기후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국가들 간 불신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수도 있고…. 경제 분쟁이 곧 정치 분쟁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아시아가 처한 가장 큰 위협요인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문제는 환경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인도·중국의 식수와 기후 문제가 심각합니다. 쓰나미의 피해도 어마어마했지요. 많은 국가들은 안보를 1순위에 올리고 환경을 그 다음에 올립니다. 하지만 환경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 중국 지도자들이 기후 문제에 큰 관심을 표명했어요. 2050년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어요. 많은 상황, 변수가 가능하지만 우리 의지에 따라 충분히 결과를 고를 수 있습니다. ‘확신에 찬 행동’이 시급할 뿐입니다.”
북한의 경제성장 잠재력 아주 크다
―한국 지도자와 만나셨지요. 어떤 조언을 하셨나요?
“노 대통령과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마을단위로 마다가스카르를 돕는 한국의 ‘빌리지 프로젝트’ 라는 흥미로운 작업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죠. 최근 한국 정부와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함께 추진 중이에요. 그 곳 마을은 매우 궁핍합니다.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치가 절실합니다.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역시 이에 대해 관심이 지대합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가난과 어려움을 깊이 느낍니다.
“그럴까요? 오늘 한국의 국가지도자와 대화하면서 한국이 동아프리카 나라들에 어떠한 값진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을 표시했어요. 나는 적합한 투자처로 탄자니아를 꼽았습니다. 탄자니아엔 안정된 정권이 있고, 관광업이 발달돼 있으며 자원도 풍부합니다. 한국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기업들 역시 이곳에서 새 비즈니스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얘기를 나눴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폐쇄적인 나라가 북한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울에서 불과 수십㎞ 떨어진 곳에 말이지요.
“북한과의 평화 협상이 타결됐을 경우, 경제적으로만 보면 북한은 분명히 성장 잠재력이 있습니다. 일단 북 문제와 관련,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개방 시점입니다. 한국이 북한의 ‘진정한’ 개방을 돕는다면 단기간 내에 많은 성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북한 문제는 현재 ‘물음표(?)’ 상태지만, 경제적 시각에서 봤을 때 분명 북한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인들 ‘누군가 도울 수 있다’는 자신감 생겨
―한국은 구체적으로 천년개발목표(MDG)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한국에서는 현재 신선하고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한국인들 스스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 거죠. 한국은 지구에서 빈곤을 몰아내는 절박한 싸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이제 선진국으로 진입했고, 한국인 UN 총장 역시 탄생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재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겠죠. 원조금을 늘릴 수 있을 것이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원조할 수 있습니다. 엔지니어, 과학자들을 파견해 조언을 할 수도 있죠. 아프리카엔 새로운 과학 기술에 목말라 하는 국가들이 가득하니까요.”
―정부보다 민간, 즉 기업들이 나서는 방안에 대해서는.
“좋은 지적입니다. 비즈니스 거래도 수많은 기회를 창출합니다. 한국의 세계적인 기업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고민할 수 있어요. ‘아프리카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뭐가 돈이 될까?’ ‘어떠한 제품을 생산해야 하나?’ ‘어느 분야에 투자해야 할까?’ 등 수많은 기회를 포착해야 하겠죠. 20~30년 후 아프리카 시장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프리카는 풍부한 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으로 훌륭한 생산 공급 기지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을 돌려 버린다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스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감명 받아
―‘빈곤의 종말’ 책 서문을 U2 보컬 보노가 써주기도 했고, 안젤리나 졸리·마돈나와도 친분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유명 인사들을 박사님이 설득한 것인가요?
“그들은 저와 만나기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관심 분야가 같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거죠. 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저와 더 깊은 토론을 나누기를 원해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전화를 해서 상의하기도 하죠.”
―그들은 세계적인 스타들입니다. 그분들과 좋은 일을 하며 수시로 만나니 (개인적으로) 너무 부럽습니다.
“보노와는 많은 시간 동안 세계 곳곳에서 함께 일했고, 말라위에선 마돈나와 같이 일했어요. 안젤리나 졸리와는 방송 프로젝트 등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잘 알게 됐고요. 같은 관심을 갖는 만큼 마음이 잘 맞아요. 자신들이 일하는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인 아티스트들이죠. 저도 그들과 자주 만나 기분이 좋아요.”
―스타 이상의 그 무엇을 몇 가지 들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정말 위대한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그들은 스스로 뛰어난 원조 전략의 관리자(manager of strategies)들입니다. 박애주의·휴머니즘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죠. 특히 이들의 대중 동원 능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자연스럽게 이 분야에 공헌을 하고 있어요. 자신들의 지위와 명성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늘 바쁘죠. 이처럼 원조 관련 활동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깁니다. 나는 어디를 가나 이 사람들을 마주쳐요. 아프리카 한가운데서나, 런던·뉴욕에서나 말이죠.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보니까….”(웃음)
지리적 악조건 극복하는 힘이 중요
―볼리비아가 6만%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율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훌륭한 처방전을 내준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유럽, 러시아에도 조언을 많이 하셨지요. 이 경험을 토대로 한국 경제에 줄 수 있는 해법이 있다면?
“볼리비아는 아주 이례적인 경제 위기(crisis)를 겪었습니다. 1985년 볼리비아 그곳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12개월 동안 인플레이션 비율이 무려 2만4000%일 정도였으니까요. 경제가 벼랑 끝에 서있었죠. 저는 그 당시 그 곳을 방문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조언했어요. 진지하게…. 세계적으로 빈곤한 나라들은 많지만 이들이 모두 볼리비아와 같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지는 않아요.”
―볼리비아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을 텐데….
“볼리비아 경제 위기는 지리(geography)와 경제 간 상관관계를 극적으로 제시합니다. 볼리비아는 육지로 둘러싸인(landlocked) 나라입니다. 나라 전체가 해발 고도 1만2000 피트에 위치하는 산악 지대로, 지역 간 이동이 매우 불편합니다. 많은 마을이 해발 4000m 고도에 위치하죠. 한 마디로 최악의 조건입니다. 이런 지리적 조건 속에서 무언가 성과를 낸다는 일은 지극히 힘든 일입니다.”
―스위스 역시 내륙에 위치하지만 대단한 발전을 이룬 국가 중 하나입니다.
“스위스는 내륙에 위치하지만, 프랑스·독일 등 경제 대국들 가까이 있습니다. 또 지리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일찍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산악 기차 등 내륙 운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분투 했어요. 개인들도 교육, 특히 외국어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힘썼어요. 종교 혁명 당시 위그노들의 유입으로 일찍 정교한 수공업, 상업이 발달했던 것 역시 큰 힘이었습니다.”
한국 앞으로 성장 지속하며, 전망 아주 밝아
―볼리비아에 조언하신 경험을 살려 한국 경제에 대한 조언을 하신다면?
“한국은 볼리비아와 비교했을 때 정반대 조건을 갖췄어요. 지형이 험준하지 않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큰 시장, 큰 기회를 열어 놓고 있어요. 게다가 경제 대국들과 가깝습니다. 현재 위기를 맞고 있지도 않고…. 한국은 지난 40년 간 어마어마한 성공 신화를 일궈왔습니다.”
―한국에 언제 처음 오셨나요? 그 때와 지금 어떻습니까?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온 것은 25년 전이었습니다. 그 때(1980년대 초)에 비해 지금은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어요. 한국 기업들은 이미 세계적인 브랜드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어요. 일상 생활 속에서 이를 쉽게 느낄 수 있죠. 어딜 가나 한국 기업들의 제품을 볼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사이 IMF 위기 등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 당시를 저도 기억해요. 당시 한국은 비관론에 빠져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한국이 상황을 빠른 시일 안에 타개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예상은 적중했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는 했지만, 경제 회복 속도 자체는 매우 빨랐습니다. 매우 조용히 빠져 나왔죠. 내가 한국 경제에 관해 매우 낙관적인 견해를 품는 주된 이유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경제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여전히 높습니다. 특히 인구 고령화와 저(低)출산 문제가 큰 이슈입니다.
“한국은 양적으로 성장을 계속하고 있어요. 점차 부국(富國)들과의 격차를 좁혀 가고 있죠. 한국은 출산율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인구가 계속해서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 놓고 경제 전망을 비관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어요. 인구와 경제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인구수와 국민 개개인 삶의 질 문제는 별개로 놓고 생각해야 하죠. 한국의 생활 수준은 분명히 더 나아질 거예요. 고령화 역시 두려워만 할 문제는 아닙니다. 나도 이렇게 늙어가고 있는데요.(웃음) 오히려 인구가 고령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공중 보건 분야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 국가 경제의 질을 가르는 지표 중 하나가 바로 장수(longevity)입니다. 따라서 고령화로 인해 절박함(de sperateness)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고령화는 분명 한국 경제에는 위협요소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령화를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미래 지향적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비관적이어서는 이렇게 될 수 없죠. 저도 연금 시스템이 좀 더 유연하게 작동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은퇴자들의 수가 노동자들의 수를 훌쩍 뛰어 넘어 재정상 위기를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은 이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갈 겁니다. 우리는 비관적인 시각보다 낙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제프리 삭스는 누구인가? 박대근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제프리 삭스는 엘리트 과정을 최고 속성으로 밟은 경제학자다. 하버드대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0년에 하버드대 경제학과 조교수로 임명된 후, 3년 만에 정교수로 승진했다. 보통 정교수 승진에 10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고속승진이다. 그와 접해 본 사람은 대부분 그를 ‘좋은 사람’이라 평가한다. 항상 얼굴을 떠나지 않는 미소, 청산유수 같지만 잘 절제된 언어, 적절한 유머 감각으로 좋은 인상을 주기 때문. 여기에 덧붙여 모든 사람들에게 진솔하고 성실한 태도로 임하는 자세가 돋보인다. 물론 경제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일 때에는 한 치 양보도 없다. 젊은 교수 시절 그는 경상수지 결정, 개방경제에서의 거시경제정책 효과에 대해 돋보이는 논문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주된 관심은 순수 경제이론의 분석보다는 이를 현실적인 경제문제의 진단·해결을 위해 사용하는 데에 있었다. 1980년대 그의 관심은 당시 외채위기에 빠진 중남미 국가들의 외채문제 해결이었다. 미국 등 채권국들이 외채 일부를 탕감해 줘야 한다는 주장을 폈는데, 그의 주장은 실제 중남미 외채문제 해결에 일조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과 구소련의 소위 체제전환국들이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자문을 제공했다. 1997년에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에는 크루그먼 등의 학자들이 주장하던 아시아 국가들의 구조적인 책임론에 대응, ‘국제 투자자들이 무분별하게 투자자금을 회수한 것이 아시아 외환위기의 주된 원인’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또 IMF가 처방책으로 제시한 구조조정·긴축정책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2년에 20여 년간 근무했던 하버드대를 떠나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 교수 겸 지구연구소(Earth Institute) 소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주로 저개발국 경제성장 문제에 주된 관심을 쏟았다. 특히 아프리카의 빈곤·기아·질병 문제의 원인을 경제학적으로 파악하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이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앞으로도 지구상에서 어려운 경제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명쾌한 분석과 해법을 제시하는 그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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